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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패에 마침표를 찍다
작성자 : 최세형
2013-04-29|조회 968


어제 드디어 대전시티즌이 충격의 3연패를 마감했습니다. 전반 막바지에 일어난 패널티킥 선언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남아 있긴 하지만 필드골은 단 한골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고무적이지만 그것보다 좋았던 것은 그라운드 위에서의 선수들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손잡아 주고 어깨 두드려 주고 박수쳐 주는 그 모습들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연패의 부담감속에서도 값진 성과를 일군 대전시티즌 선수 및 코칭스탭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어제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려는지 오늘 오전엔 차분한 봄비가 내렸네요. 쉬어가는 의미에서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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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박목월 시인"의 아들인 박동규 교수가 부모님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6.25와 나의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던 우리는 개천에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호박잎을 너무따서 호박이 자라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어머니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행복


 

어린 시절 우리집은 가난했습니다. 시를 쓰시는 아버지는 돈이라곤 모르고 세상 물정 어두운데다 형제까지 많아서 살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갖고 싶은게 있어도 차마 사 달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해 늘 속으로만 우물되곤 했습니다.


 
어느날 숙제를 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친구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동규야, 노올자 ~>  나는 빼꼼이 창문을 열고 말했습니다.  <어, 나 지금 숙제해야 되는데.......너 혼자 놀아! 미안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는 몸을 한바퀴 빙 돌리며 말했습니다. 녀석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하, 나 가방샀다. 이거 봐라. 하하하 하하하>  친구는 새로 산 가방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좋겠다. 잘 가 .............>  나는 친구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히히, 너도 가방 사 달라고 그래, 나 간다.............안녕!>

친구는 신나게 손을 흔들며 집으로 갔습니다. 나는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했지만 친구의 새 가방이 너무나 부럽고 내 낡은 책보가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엄마, 나도 가방 사 주시면 안돼요?>  <가방? 그래 크리스마스 때 사 주마.>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뭘 사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언제나 크리스마스에 사 줄 것을 약속하며 미루곤 했는데 우리 형제들은 늘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습니다. 부모님은 자식과의 약속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도 나는 어김없이 새 가방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어느날 아버지는 우리 다섯 형제들을 빙 둘러 앉힌 뒤 원하는 선물을 말하도록 했습니다. 언제나 처럼 맨 아랫 동생이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노트에 적었습니다. <응, 저는 막대 사탕요.>  막내는 막대 사탕을, 넷째는 유리구슬을, 셋째는 스웨터였습니다. 이제 둘째 여동생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동생은 자기 차례가 오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털외투 사 주세요!>  
  


순간 어머니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아버지도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나는 연필을 들고 있던 아버지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가죽 구두를 사 달랠 작정이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래, 동규 너는?>   <저...저... 저는 털장갑이요>   
  


그날밤 나는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속에서 치미는 설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런데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불을 들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눔이 철이 들어서 ... 철이 ... 들어서...........>  

그해 크리스마스에 나는 털장갑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털장갑 속에는 어머니가 쓰신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동규야. 하느님이 백배 천배 축복을 주실꺼야>   나는 그 장갑을 껴보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편지속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이눔이 철이 들어서, 철이 들어서...........> 하시던 아버지의 말 한마디야 말로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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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박동규 교수님의 강연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글입니다.

 


가난했지만 가난을 모르고 살게 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신발이 없어 어머니는 시집 올 때 입고 온 비단 치마를 자르고 바느질 해 비단신발을 만들어주었다. <중국놈 같다>며 놀려대는 친구들로 인해, 석달 반을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에게 이 얘길 전해들은 어머니는 그날 이후 박목월 선생이 쓰다 버린 원고지를 주워 안방 경대 옆에 쌓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이 돈을 달라고 조르면 우리 손을 잡고 안방에 데리고 가서 원고지 위에 손을 얹게 하고는 <우리 집은 글쓰고 사는 집이라 돈을 줄 수가 없구나>하며 타일렀다. 한번도 그냥 돈이 없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가난의 설움이나 가난이 주는 어두움, 속쓸임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글쓰면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다. 어머니에게 긍정적인 사고밖에 배운게 없다.”


 
“내 얼굴에서 아직도 순진한 부분이 남아있다면 우리 어머니가 그려주신 거다. 산다는 것은 이거다. 옷 좋은 것 입어봤자다. 살아가는 모양, 꼴을 만들어가야지.... 가지고 싶은 것이 있기에 사는 것이 아니다. 큰 집이 있어도 행복해야 그 집의 주인이 된다. 암만 큰 집이 있더라도,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 아닌가...”


 

 


이준우
좋은 글입니다...잘 읽었습니다...
201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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